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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없는 진단은 폭력입니다 — 자산운용사 조직문화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

9주짜리 조직문화 컨설팅에서 가장 오래 붙들었던 문장은 방법론이 아니라 한 줄이었습니다. '설명 없는 진단은 폭력입니다.' 자산운용사 프로젝트 회고.

최익성·
설명 없는 진단은 폭력이다 — 자산운용사 조직문화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 | 최익성
Project Note · 2023

설명 없는 진단은 폭력입니다

2023년 봄, 한 자산운용사와 조직문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임직원 200명대, 국내 대형 금융지주 계열. 인재가 곧 자산인 업(業). 좋은 사람을 어떻게 데려오고 어떻게 붙잡아둘 것인가가 이 회사의 생존과 직결되는 곳이었습니다.

첫 미팅에서 담당 임원께서 물으셨습니다. "저희 회사, 문화 진단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결과도 다 압니다. 이번엔 뭐가 다릅니까?"

그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번엔 진단 결과지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설명 없는 진단은 폭력입니다."

이건 프로젝트 제안서에 넣은 문장이지만, 사실 컨설팅을 오래 하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진단 리포트를 열심히 만드는가. 100페이지짜리 파워포인트를 넘기면 조직이 정말 바뀌는가.

대부분의 조직문화 진단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서베이를 돌린다 → 리커트 척도로 숫자를 뽑는다 → 벤치마크 대비 낮은 항목을 빨간색으로 표시한다 → "심리적 안전감 3.2점, 업계 평균 대비 -0.4"라고 적는다 → 임원 보고 → HR팀이 개선 과제 몇 개 받아든다 → 다음 해에 다시 서베이. 진단이라는 이름의 관성입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폭력에 가깝습니다. 자기 이야기가 숫자 하나로 요약되고, 그 숫자를 두고 왜 이렇게 낮냐고 추궁당합니다. 설명도 없습니다. 맥락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또 같은 서베이가 옵니다.

그래서 무엇을 다르게 했나

가장 오래 붙들었던 것은 진단 설계 그 자체였습니다. 방법론 카탈로그(ICF, SOQ, OHI, CVM...)를 늘어놓고 고르는 것은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이 회사의 사람들이 진단에 응답하는 그 20분 동안 무엇을 경험하게 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희는 하나의 원칙만 지켰습니다. 진단이 하나의 직원경험이 되게 하자. 조직문화는 결국 경험 → 믿음 → 행동의 순환이니, 진단도 그 순서를 따르게 했습니다. "당신은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십니까?" 같은 관념적 문항 대신,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낸 마지막 순간이 언제였습니까?"를 물었습니다. 숫자를 뽑기 위한 진단이 아니라, 답하는 사람이 자기 조직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진단이었습니다.

자산운용사 조직문화 진단 프로젝트 개요
프로젝트 개요. 총 9주, 3단계. 참고로 첨부한 화면은 정리용 요약본이지 클라이언트 리포트는 아닙니다.

잘된 것과, 잘 안 된 것

잘된 것은 참여율이었습니다. 200명대 조직에서 90%를 넘겼습니다. 서베이 링크가 하나의 이벤트가 됐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습니다"라는 피드백도 받았습니다. 워크샵에서는 임원과 사원이 같은 테이블에서 같은 그림에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이 장면이 프로젝트 결과보다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잘 안 된 것도 있습니다. 진단 이후의 실행이었습니다. 저희는 6개의 실행 아젠다까지 설계해서 넘겼는데, 그중 절반은 조직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컨설턴트가 떠나고 나서도 굴러가는 실행체계를 만드는 일은, 컨설팅 계약서에 도장 찍는 순간에 이미 설계됐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마지막에 급하게 붙였습니다.

그때 배운 것이 있습니다. 진단을 잘 설계하는 것보다, 진단 이후에 누가 어떤 회의에서 이걸 다시 꺼낼지를 설계하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중요합니다. 이 순서를 반대로 알고 있는 컨설팅 회사가 많습니다. 저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진단은 리포트가 아닙니다. 대화의 시작점입니다.

자산운용업은 특히 그렇습니다. 개인 성과가 명확한 사람들, 숫자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 이런 곳에서 조직문화 진단이 성공하려면, 그 결과가 다시 다음 분기 성과 회의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조직문화 담당자만 아는 지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난 지 2년쯤 되었습니다. 최근에 그 회사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워크샵에서 나온 문장 하나를 아직도 회의에서 인용합니다." 어떤 문장이었는지는 여기 옮기지 않겠습니다. 그건 그들의 것이니까요.

프로젝트 회고에는 반드시 실패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원칙입니다. 성공 사례집은 이미 세상에 충분히 많고, 그것들은 대개 진짜가 아니니까요.
최익성 · 플랜비디자인 · 20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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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성 (Daniel Choi)
경영학 박사 · 조직개발 전문가

조직개발, 리더십, 조직문화 전문가. 20년간 기업 현장에서 조직의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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