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고 16,200원,
그 떨림의 정체를 밝히려는 기록
2026년 9월, 파지트에서 백재민 저자의 『잔고 16,200원 — 청년정치와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백 년 전의 선례들』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이 책을 편집자로서 오래 붙들었던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통장 잔고가 16,200원이던 날, 저자는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게 5,500원짜리 음료수를 건넸습니다. 전 재산의 삼분의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뿌듯함이 아니라 '아메리카노가 더 싼데'라는 계산이었고, 남은 것은 쓴맛이었습니다.
이 책은 그 떨림의 정체를 밝히려는 기록입니다.
가난은 설명할 언어를 빼앗긴 문제입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이 어려움은 내 의지가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어떤 이의 생활고는 그 사람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노력이라는 말이 어떻게 출발선의 차이를 가리게 됐는지, 사명감이 처우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산업화를 일군 세대가 왜 지금 리어카를 끌고 있는지를 차례로 따집니다. 문제는 노력의 총량이 아니라, 자기 처지를 설명할 언어가 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백 년 전 사람들은 모두 졌습니다
저자가 만난 인물들은 하나같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서 병을 얻어 출옥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흔여섯이었습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 김단야는 동지의 손에 처형됐고 무덤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여운형은 좌우 어느 쪽에도 서지 않으려다 열두 번째 테러 끝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마치며 저자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람시의 노트는 그의 굽은 등보다 오래 살아남아 이 책의 분석 틀이 됐습니다. 여운형이 1945년에 적은 문장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패배는 끝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 숙제였습니다.
1938년, 같은 해에 갈린 두 길
이 책이 배치한 하나의 예외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김단야가 무덤도 없이 처형된 1938년, 그해에 스웨덴에서는 노사가 살트셰바덴 협약을 맺었습니다. 같은 해에 갈린 두 길을 나란히 놓고, 이 책은 평등이 어떻게 생산성이 될 수 있는지를 논합니다. 이 대비 하나만으로도 21세기 한국이 어떤 물음 앞에 서 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자기 진영을 겨누는 장(章)이 있습니다
자기 진영의 실패를 남 이야기로 쓰는 책은 흔합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쓰는 책은 드뭅니다.
21장에서 저자는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에서 스스로가 로베르트 미헬스가 말한 '과두제의 철칙' 속 관료였다고 적습니다. 절차를 알고 있었고, 그 지식으로 독단적으로 움직였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적 절차를 사유화했다고 씁니다. 저자는 서두에서 자신의 위치를 감추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척하지 않겠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진보가 왜 대중에게서 멀어졌는지, 권력을 쥔 진보가 어떻게 변질됐는지를 끝까지 따져 묻습니다.
거대담론을 겁내는 사이, 우리 몫만 줄었습니다
마지막 장의 문제의식은 분명합니다. 좌파가 거대담론을 위험하다며 입을 다무는 동안, 세계를 설명하는 큰 이야기를 다른 쪽이 먼저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자리를 다시 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계급과 불평등을 말하던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스물여덟 청년이 사회민주주의를 다시 꺼내 듭니다.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라 제안서입니다.
저자, 백재민
자칭 보통청년. 경북 포항에서 나고 자랐고, 그 포항에서 세 번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중퇴를 결정하는 와중에도 일과 정당 활동은 쉬지 않았습니다. 정의당에서 사회민주당까지, 대한민국의 진보정치와 청년정치를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길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는 일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가난의 원인을 알고 싶어 책을 펼쳤고, 거기서 그람시와 루쉰과 김단야와 여운형을 만났습니다. 하나같이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패하고도 잊히지 않았습니다. 다음 사람에게 또 다른 과제를 안겼습니다. 최근에는 포항과 경주 사이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진보정치와 청년정치에서 겪어본 일들이 대학원 선택의 이유였습니다.
이 책이 필요한 자리
노력의 언어에 지친 청년에게, 진영의 안쪽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말할 용기를 찾는 활동가에게, 사회복지 현장의 사명감과 처우 사이에서 흔들리는 실무자에게, 그리고 왜 우리가 다시 세계를 말해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이 책이 하나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패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음 사람의 도구가 되는지, 이 책은 스물여덟 청년의 시선으로 그 과정을 증명합니다.
출판 · 강연 · 인터뷰 문의
문의하기 →『잔고 16,200원』은 2026년 9월 21일 발행되며,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