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합일 知行合一
2022년 겨울, 한 대기업 IT 서비스 계열사와 커리어 레벨(CL)별 역할 정립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임직원 수천 명 규모. 조직 안에는 이미 CL1부터 CL4까지의 레벨 체계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름 아래에서 각 레벨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사람마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담당 임원께서 첫 미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CL2와 CL3 사이의 경계가 애매합니다. 승진은 시켜야 하는데, 시키고 나면 어떤 행동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역할 정의라는 것을 저는 오래 해왔습니다. Task, Skill, Behavior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일. 역량 모델을 만들고, 행동 지표를 뽑고, 진단 도구로 격차를 측정하는 일.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왜 지금까지 만든 역할 정의서들은 결재 후에 서랍으로 들어갔을까.
이 문장을 프로젝트 중반에 방법론 카드로 꺼냈습니다. 원래 방법론 문서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컨설팅 룸에서 CL3 대상자들의 인터뷰 녹취를 읽다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몰라서 못 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하지 못하고 있었고, 하고 있기는 한데 자기가 하는 게 그 역할인 줄 몰랐습니다.
지행합일. 알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면서 행하고, 행하면서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들 역할 정의는 완성품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살면서 계속 다시 쓰는 문서여야 했습니다.
시각차, 그리고 시간차
인터뷰 데이터를 정리하다가 두 개의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시각차(視角差)와 시간차(時間差). 이 프로젝트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었던 개념이자, 지금도 다른 프로젝트에 계속 가져다 쓰는 프레임입니다.
시각차는 무엇이 중요한 역할인지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CL3 본인은 "나는 후배를 성장시키는 사람"이라고 답하지만, 그의 리더는 "저 친구는 여전히 자기 프로젝트 실행자"라고 봅니다. 후배는 "우리 선배는 아직도 아무것도 안 알려주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같은 사람에 대해 세 개의 초상화가 나옵니다. 어느 것도 완전한 오해는 아니고, 어느 것도 완전한 진실도 아닙니다.
시간차는 더 미묘합니다. 중요하다고 답한 것과 실제 시간을 쓰는 것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CL3에게 "당신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후배 육성"이나 "전략적 의사결정"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일주일 캘린더를 열어보면 그 시간이 5%도 안 됩니다. 나머지 95%는 CL2 시절에 하던 일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시각차가 크면 논쟁이 시작됩니다. 시간차가 크면 번아웃이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조직은 시각차를 줄이려고 역량 모델을 만들고, 워크숍을 열고, 슬로건을 붙입니다. 하지만 시간차는 잘 안 다룹니다. 왜냐하면 시간차를 다루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안 하기로 결정해야 하는데, 그건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무엇을 만들었나
이 통찰을 바탕으로 CL2용, CL3용 두 개의 교육 과정을 개발했습니다. 사전 온라인 진단 → 본 오프라인 1일 7시간 → 사후 팔로업으로 구성했습니다. 흔한 구조입니다. 다만 안에 담긴 문제 정의는 흔하지 않았기를 바랐습니다.
CL2 과정의 핵심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안 할 겁니까?" CL3 과정의 핵심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당신이 육성해야 할 사람의 이름 세 명을 지금 여기 적어보십시오." 두 질문 모두 워크숍장을 조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잘된 것과, 잘 안 된 것
잘된 것은 프레임의 수명이었습니다. 시각차·시간차라는 두 단어는 이 회사 안에서 이후 몇 년간 살아남았다고 들었습니다. 리더 회의에서 "이건 시각차 문제인가요, 시간차 문제인가요?"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쓰였다고 합니다. 방법론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문서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단어가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처음으로 그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잘 안 된 것은 교육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사전-본-사후 3단계 구조를 만들었지만, 실제 운영에서 '사후' 파트가 늘 축소되었습니다. 인사팀도 저희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후가 진짜 알맹이라는 것을. 그러나 예산과 시간의 압박 앞에서 언제나 먼저 잘리는 것은 사후였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을 못 찾았습니다. 학습이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넘어서, 학습이라는 이름의 습관을 어떻게 조직에 심을 것인가. 이 질문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돌아보면 이 프로젝트가 저에게 가르쳐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역할 정의는 문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대화의 언어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 시각차·시간차라는 단어 두 개가 5백 페이지짜리 매뉴얼보다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둘째, 완벽한 방법론이 조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 조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이 자기 캘린더를 열어보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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